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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전


유홍준 선생은『나의 문화유산답사기』의 한 권 부제를 “인생도처유상수”로 잡았다. 우리가 사는 삶의 도처에 숨어 있는 고수들이 있고, 그들을 통해 새로운 깨달음을 얻었다는 의미다. 지리산 빨치산 할머니 고계연, 반세기 넘게 홀로 가문을 지켜온 종부 김후웅, 일본군 위안부 김수해 할머니, 중국 팔로군 출신 기공 연구가 윤금선, 문화판의 걸출한 욕쟁이 할머니 박의순, 황진이보다 더 치열했던 춤꾼 이선옥, 한 달의 인연을 영원으로 간직한 최옥분 할머니 일곱 분 모두 상수다. 그리고 이 책을 쓴 김서령 작가도 마찬가지. 김서령 작가를 알지 못했다. 먼 길을 가셨다는 소식을 듣고 “글을 아름답고 품위있게” 썼다는 것을 알았다. “내가 아는, 가장 좋은 향기가 났던 여자”라는 글을 보기도 했다. 허수경 시인이 끝내 돌아갔다는 소식을 듣고 아파하던 무렵이라서 김서령 작가의 부고도 가슴이 아팠다. 내가 기껏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그의 책을 읽고 추모하는 것이겠다 싶어 책을 들었다. 책을 읽는 중에 평창동 일선사에 49재 동안 머무신다고 하여 잠깐 다녀올까 하는 마음도 든다. 늦게 알게 되었지만 둘레 사람들의 평가는 옳았다. 일곱 명의 상수 중에 가장 마음을 당겼던 사람은 최옥분 할머니다. 할머니는 50년간 미혼모로 살았다. 한국전쟁 피난길에서 마주친 공포의 장면을 잊지 못해 낙산사 근처에서 보육원 활동을 하던 무렵, 당시 문단의 기린아 김종후를 만난다. 그는 전쟁을 피해 남쪽으로 피난 왔다가 결국 38선을 넘지 못하고 낙산사로 흘러들었다. 두 사람의 만남은 어쩌면 전쟁 덕이고, 평생의 이별도 결국 전쟁 탓이었다. 속세를 떠나 승려의 길로 들어선 김종후 앞에 최옥분이 나타났고, 김종후는 결국 승려의 길을 버리고 사랑을 택한다. 그런 김종후가 한 달 만에 자동차 사고로 죽고 최옥분은 50년이 넘게 사별한 남편의 무덤을 지키며 늦게 태어난 딸과 함께 살아간다. 남편의 고향이 가까운 속초에서 유치원을 경영하며. 그들은 살아서 단 한 달을 함께 살았다. 한 달…… 평생에 한 달, 그 짧은 인연이 영원을 만들고 있다. 세상에는 수십 년을 함께 살다가 원수가 되어 헤어지는 인연도 있고 한 달이 영원으로 이어지는 인연도 있다. 영원이란 살아 있는 인간이 도무지 예측할 수 없는 미지다. 그곳에서 김종후 최옥분 부부는 머잖아 다시 만날 것이다. 아니 다시 만난다는 것은 적당한 말이 아니다. 바다를 내려다보는 무덤 앞에서 두 사람은 날마다 충분할 만큼 함께 시간을 보내고 있으니까. (251 -252쪽) 빨치산으로 3년 동안 지리산에서 생활하다 수용소에 갇혀 잃어버린 고계연 할머니의 발가락, 방앗간에 가서 그곳의 떡이 말라붙은 헝겊 무더기를 빨아 빨랫줄에 백여 장의 하얀 천 조각을 널어 준 김후웅 할머니의 손길, 일본군 위안부 노릇을 하다 임신을 하여 수술했는데 그때 들어내 버려진 김수해 할머니의 자궁, 팔로군으로 행군하다 부상병을 업고 달렸다는 윤금선 할머니의 등, 서양여자 누드를 보고 묻는 시아버지한테 “아버님, 머리칼이 노라니 거기도 노랗습니다” 대답하는 박의순 할머니의 말, 동양여자의 아름다움은 아랫도리에 있지 않다는 이선옥 할머니의 손가락 선에 마음이 깊이 간다. 이들의 웅숭깊음을 끌어낸 김서령 작가를 살아생전 못 본 것이 아쉽다.
역사 속에 던져진 일곱 여자의 이야기

우리는 삶의 크고 작은 토막들을 통틀어 ‘이야기’라고 부른다. 영화도 소설도 노래가사도 역사도 체험도 모조리 이야기라는 말 속에 녹여낸다. 선현들은 그런 이야기를 전傳이라는 형식으로 묶어내기도 했다. 춘향전, 심청전, 흥부전, 박씨전이 그런 것들이다. 이 책 여자전女子傳, 한 여자가 한 세상이다 는 한국 현대사를 맨몸으로 헤쳐 온 여자들의 이야기다. ‘내 살아온 사연을 다 풀어놓으면 책 열 권으로도 모자란다’고 흔히 말하는, 역사 속 이름 없는 일곱 여자의 인생 역정을 다루고 있다. 이들은 자신에게 무슨 일이 닥친 지도 모른 채 한국 현대사의 복판으로 던져졌다. 해방이 되었지만 그것의 의미를 몰랐고, 전쟁이 일어났지만 누가 누구를 향해 총을 쏘고 있는지도 몰랐다.

피난길에 아버지와 오빠를 찾아 산에 올랐다가 동상으로 발가락이 빠져버린 지리산 빨치산 하나. 배고픔을 면하기 위해 만주에 갔다가 중국 팔로군이 되어 마오쩌둥의 대장정에 참여한 뒤 중공군의 자격으로 한국전쟁에 투입됐던 여자 군인 하나. 가족의 생계를 위해 기차에 올라탔다가 만주에서 일본 군인의 성노예 생활을 하느라 자궁까지 적출당한 위안부 하나. 월북한 좌익 남편을 기다리며 수절한 안동 종부 하나. 50년을 죽은 사람만 쳐다보며 살아온 옛날식 미혼모 하나. 피난지 부산에서 우연히 창문 너머 춤을 배웠던 춤꾼 하나. 전쟁을 참혹하게 겪지는 않았으나 일상 속에서 남성과의 전쟁을 누구 못지않게 가혹하게 치른 미술관 주인 하나.

파란만장한 인생을 겪어야 했던 이들의 애절한 삶 속에는 한국 현대사의 파편이 곳곳에 박혀 있다. 그러나 하나같이 내 인생이 처절했노라고 한숨 쉬고 앉아 있지는 않는다.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고통 속에 내던져졌지만 두 발로 똑바로 서서 수난의 세월을 헤쳐 나왔다. 빨치산에서 탁월한 세일즈우먼으로, 팔로군에서 의사와 기공수련가로 변신했다. 황진이보다 더 혁명적인 춤꾼, 문화계를 선도하는 걸물, 아이들을 사랑으로 보살피는 유치원 원장이 되었다. 자신의 인생을 가꾸고 이웃의 인생에 애정을 베풀며 살아왔다. 그것은 무슨 무슨 이념 때문도 아니고, 거창한 역사의 진보라고 설명할 수도 없다. 오롯이 휴머니즘, 인간애다. 이렇듯 삶에 대한 의지와 긍정, 수난을 털어내는 유머를 껴안고 살아온 일곱 명의 인생행로는 한국 사회가 전쟁과 분단, 가난과 독재를 딛고 발전하는 힘의 바탕이었다.


머리말_꽃으로 문질러 쓴 애달픈 이야기

내가 살아남아 1미터짜리 농어를 잡을 줄 짐작이나 했겠나
지리산 빨치산 할머니 고계연

왜 살아도 살아도 끝이 안 나노
반세기 넘게 홀로 가문을 지켜온 종부 김후웅

내 자궁은 뺏겼지만 천하를 얻었소
일본군위안부 김수해 할머니

죽음의 강 황하를 건너온 소녀
중국 팔로군 출신 기공 연구가 윤금선

종횡무진 욕으로 안기부를 제압하다
문화판의 걸출한 욕쟁이 할머니 박의순

난 기생이다, 황진이다, 혁명적 예술가다
황진이보다 더 치열했던 춤꾼 이선옥

지상에 없는 남자, 그만을 향한 50년
한 달의 인연을 영원으로 간직한 최옥분 할머니